깊은역사와 수려한 자연경관, 감동이 있는 화순여행!
방랑시인 김삿갓도 머물게한 비경 - 화순적벽
전남 화순군 이서면 창랑리, 보산리, 장학리 일대 7km에 걸쳐 있는 붉은 절벽을 화순적벽이라 부른다. 화순적벽에는 노루목적벽, 보산적벽, 창랑적벽, 물염적벽이 있는데 통칭해서 화순적벽이라 부른다.
적벽이라 불리기 시작한 것은 조선 중종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묘사화로 화순 동복으로 유배를 온 신재 최산두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보고 중국의 적벽에 버금간다 하여 이름 붙였다. 이후 호남을 대표하는 하서 김인후, 담양 식영정의 주인 석천 임억령,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하다 금산에서 장렬히 전사한 제봉 고경명 등 내노라하는 선비들이 적벽을 찾았다. 석천 임억령은 적벽을 유람하고 '적벽동천(赤壁洞天)'이라 남기기도 했다. 조선 후기 들어 실학자 홍대용과 정약용도 아버지를 따라 유람을 나섰고,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불리는 난고 김병연도 화순을 세 번이나 찾을 정도로 각별했다.
적벽은 오래전부터 시인묵객도 많이 찾았지만, 서민들의 휴식처이자 피서지였다. 적벽의 높은 절벽 위에서 짚불을 강으로 날리는 낙화놀이도 즐겼다. 가까운 담양에서도 사람이 몰려올 정도로 장관을 이뤘다고 한다. 동복댐이 건설되기 전만 하더라도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이자 여름이면 피서객으로 북적이던 곳이었다. 하지만 1971년 상수도보호구역으로 지정되고, 1985년 동복댐이 건설되면서 출입마저 할 수 없게 되었다. 댐이 들어서면서 적벽의 일부를 비롯해 인근 15개 마을도 수몰됐다. 2014년 10월 적벽이 개방되어 정확히 30년 만에 감격스러운 상봉을 하게 된 셈이다. 30년 동안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았으니 적벽과 함께 천혜의 자연이 고스란히 남은 것은 당연하다. 화순적벽 가운데 최고 절경으로 이서면의 노루목적벽을 꼽는다. 물염적벽과 창랑적벽은 아무때나 쉽게 만날 수 있는 반면, 노루목적벽과 보산적벽은 적벽투어를 통해서만 만나볼 수 있다.
천하제일경 화순적벽 - 거북섬
화순적벽 거북섬은 투어버스를 타고 관리사무소에서 조금 가다 보면 우측에서 볼 수 있는데 거북이 형상을 하고 있어 거북섬이라 불린다고 한다. 마치 동복댐 이서적벽을 향해 헤엄쳐 가는 형상을 하고 있다.
천하제일경 화순적벽 - 보산적벽
노루목적벽 앞에서 망향정을 품고 있는 작은 적벽이 보산적벽이다. 장항적벽보다 규모는 작지만 세파에 깎이고 파인 모양새가 신비롭다.물염적벽과 창랑적벽은 상시개방으로 쉽게볼수 있지만, 노루목적벽과 보산적벽은 적벽투어를 통해서만 볼수 있다.
천하제일경 화순적벽 - 노루목적벽
화순적벽 가운데 최고 절경으로 이서면의 노루목적벽을 꼽는다. 수많은 시인들이 영감을 얻어갈 정도로 경치가 수려하였다. 산의 형세가 노루(獐)의 목을 닮았다고 '노루목적벽'으로 불린다고한다. 물염적벽과 창랑적벽은 아무때나 쉽게 만날 수 있는 반면, 노루목적벽과 보산적벽은 적벽투어를 통해서만 볼수 있다.
천하제일경 화순적벽 - 망미정
망미정(望美亭)은 전남 화순군 이서면 장학리에 있는 정자로서, 적벽을 바라다보며 서 있다. 정자의 주인은 병자호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정지준(丁之寯, 1592∼1663)으로 당시 인조가 청나라 태종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분개한 나머지 고향에 내려와 초막을 짓고 은둔 생활하며 생을 마감했다. 정지준은 망미정에서 학문에 전념하다가 계묘년(1663) 12월 숨을 거뒀다.
정자는 1646년(인조 24) 적벽 강가에 지어져 전해 내려오다, 동복 댐이 들어서면서 1983년 현 위치로 옮겨 후손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천하제일경 화순적벽 - 망향정
1983년 동복댐의 완성으로 적벽의 절반은 물에 잠기게 되고 그 주위에 살던 마을 주민들은 고향을 떠나게 된다. 적벽의 맞은편에 고향을 잃은 사람들의 설움이 담긴 정자, 망향정이 있다. 망향정은 장두석 선생님이 주도하에 전라도의 윤창병 목수가 지었다. 지금도 이곳에서는 고향을 잃고, 선산에 가지 못하는 수몰민들이 매년 모여서 시제를 모시고, 천제를 지낸다고 한다.
망향정 주변에는 적벽동천과 적벽팔경이 새겨진 비석, 수몰된 15개 마을의 비석을 세운 망향비와 망배단, 천제단 등이 남아 있다.